제목 : 바알과 아세라는 잡신일 뿐일까? 고대 근동 종교와 구약성경의 비밀
[왜 신들인가?]_주원준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_1회 – YouTube
핵심 요약
- [한 줄 요약] 구약 성경은 고립된 섬에서 하늘의 신비만 받아 적은 책이 아니라, 고대 근동 세계의 강력한 신들(바알, 아세라 등)과 치열하게 소통하고 투쟁하며 야훼 하나님의 유일하신 권위를 정립해 나간 생동감 넘치는 역사적 기록입니다.
- 평신도 신학자의 시선: 가톨릭 성직자 위주의 신학을 넘어, 세상 학문과 교회의 전승을 연결하는 평신도 전문가의 눈으로 최신 성서학 연구 성과를 대중에게 가장 쉽고 재미있게 전달합니다.
- 포용과 수용의 공교회성: 구약의 신학자들은 타 종교를 무조건 정죄하기보다, 그들의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선별적으로 수용하거나 과감히 배격하는 방식을 통해 야훼 하느님의 온전하심을 입증했습니다.
타임라인별 상세 내용
[00:00 ~ 04:16] 도입부: 가톨릭 학술상 수상작 ‘구약성경과 신들’ 강좌를 열며
- 강사 소개 및 지표: 한님성서연구소 연구원이자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등에서 고대 근동 종교와 히브리어를 가르치는 주원준 박사의 첫 평화방송 강연입니다.
- 학술상의 대중화: 올해 가톨릭 학술상 연구상을 받은 저서와 동명의 강연으로, ‘학술상 책은 지루하고 졸리다’는 선입견을 깨고 시청자들이 채널을 돌리지 않도록 평신도의 눈높이에서 가장 쉽고 흥미롭게 구약 성경의 핵심 알맹이를 전달하고자 합니다.
[04:17 ~ 06:49] 경상도 사투리가 낳은 해프닝과 성서학의 아버지 ‘예로니모 성인’
- 가톨릭 문화의 낯설음: 한국 가톨릭교회가 선교 200년을 넘어 300년으로 향하고 있지만, 일반 대중에게 성당의 문화는 여전히 낯선 영역입니다.
- 예로니모와 에로 이모: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어떤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을 “예로니모입니다”라고 소개했더니, 비신자 친구가 ‘외로운 이모’ 혹은 ‘애로 이모’로 알아들었다는 유쾌한 일화가 있습니다.
- 성경 번역의 거장: 본문에서 다루는 성서학당의 주인공인 예로니모(히에로니무스, 제롬) 성인은 과거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된 성경을 최초로 라틴어 성경(불가타)으로 번역해 낸 성서학의 아버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국어 성경을 읽을 수 있는 토대를 닦은 거장입니다.
[06:50 ~ 12:36] 우리 교회에 ‘평신도 신학자’의 양성과 활용이 시급한 이유
- 성직자 중심 문화의 한계: 우리 교회는 대개 신부님이나 수녀님들만 신학 강의를 전담해 왔기에, 평신도가 단상에 서서 신학을 논하는 것을 낯설어합니다. 20년 전 주원준 박사가 학문의 길을 걸으려 할 때도 “돈도 못 벌고 가난할 텐데 왜 하느냐”며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 직분과 은사의 조화: 그러나 목회 현장에서 일선 신부님들은 행정과 목양으로 너무나 바쁘십니다. 이제는 교회의 미래를 위해 철저하게 준비된 평신도 전문가(신학자)를 양성하고, 이들을 강단에 세워 직무를 조화롭게 나누는 ‘활용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12:37 ~ 21:23] 학문(신학)이 주는 최고의 매력: 삶을 정결하게 하는 위로
- 스트레스를 푸는 학문: 일반 세상 학문(공대, 경영학 등)은 외우고 계산하느라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며, 이를 풀기 위해 성당에 와서 기도를 합니다.
- 신학의 역설적인 기쁨: 그러나 신학은 학문 자체가 우주의 원리와 하느님의 사랑을 탐구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면의 스트레스가 풀리고 마음이 맑아지는 최고의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무작정 텍스트만 외우는 박제된 공부가 아니라 하느님과 인격적으로 마주할 때 진정한 공부의 기쁨이 뿜어져 나옵니다.
[21:24 ~ 28:40] 구약성경을 향한 두 가지 치명적인 왜곡과 바이러스 타파
- 주원준 박사는 유학 생활(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구약 성경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두 가지 극단적인 왜곡을 목도하고 이 책을 쓰기로 결단했습니다.
- 왜곡 1 (길거리 이단들의 문자주의): 구약의 역사와 거시적 맥락을 모른 채 몇몇 구절만 앵무새처럼 외워 자의적으로 짜 맞추는 근본주의적 프레임입니다.
- 왜곡 2 (인터넷 무신론자들의 폄하): 구약의 하나님 ‘야훼’는 그저 폭력과 전쟁의 신이며, 고대 이스라엘은 이집트나 바빌론의 신화를 대충 베껴 쓴 사기꾼 집단이라는 조롱입니다. 본 강좌는 이 두 가지 바이러스를 학술적 팩트를 통해 완벽하게 치료(백신)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28:41 ~ 37:40] 고대 이스라엘의 실체: 고립된 섬이 아닌 국제 무역의 중심
- 신용을 바탕으로 한 문화 교류: 역사적 팩트로 볼 때, 고대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이라는 거대한 세계의 아주 작고 연약한 한 부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생계를 위해 주변 강대국들과 끊임없이 무역(장사)을 해야 했습니다.
- 타 종교를 향한 지식 축적: 장사를 잘해 신용을 쌓으려면 상대방의 문화와 종교를 깊이 알아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변 민족들이 남긴 영수증, 집터, 편지 등을 주고받으며 자연스럽게 그들이 섬기던 ‘신들의 이름과 정체’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37:41 ~ 42:17] 구약성경 속 ‘신들’의 정체: 바알과 아세라, 그리고 엘리아의 대결
- 유일신 성경에 웬 신들인가: 우리 신앙은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만 믿는 유일신 종교입니다. 그럼에도 구약 성경 제목 뒤에 ‘신들’이라는 복수형 명사를 붙인 이유는, 성경 본문 자체에 수많은 이방 신들의 이름(바알, 아세라, 몰록, 다곤 등)이 빽빽하게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 판관기(사사기)와 열왕기의 영적 현실:
- 판관기 10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곤경에 처할 때마다 하느님을 저버리고 바알을 섬겼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은 화가 나셔서 “너희가 선택한 바알 신들에게나 가서 도와달라고 부르짖으라”며 위선을 짓밟으십니다.
- 열왕기상 18장의 갈멜산 대결을 보면, 하느님의 친백성 이스라엘 영토 안에서 야훼의 예언자 엘리아는 왕과 왕비에게 박해받아 홀로 외로이 서 있는 반면, 이방 바알의 예언자는 무려 450명이나 득세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본질은 이 거대한 이방 신들의 유혹 속에서 야훼의 유일한 권위를 지켜낸 투쟁의 역사입니다.
[42:18 ~ 44:36] 결론: 배타성을 넘어선 공교회적 선교의 프레임 회복
- 비현실적인 무릉도원의 청산: 구약의 이스라엘은 이슬만 먹고 사는 신비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애 낳고 농사지으며 불순종과 회개를 반복하던 현실의 국가였습니다. 하느님은 고대 근동에서 가장 작고 비천한 지체(이스라엘)를 선택하셔서 인류 구원의 드라마를 연출하셨습니다.
- 선별적 비평과 포용: 구약 성경은 무조건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박제된 책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은 주변 종교를 대단히 깊이 연구했으며, 어떤 신(문화)은 단호히 배격하고, 어떤 부분은 이스라엘 신앙 안으로 선별적으로 수용(토착화)하여 발전시켰습니다. 본 강좌는 책에 등장하는 6가지 매력적인 신들의 실체를 하나씩 파헤치며 우리 신앙의 스펙트럼을 넓혀줄 것입니다.
제목: 구약성경과 신들: 평신도 신학자가 들려주는 고대 근동의 시간과 공간
[구약성경의 무대, 고대 근동]_주원준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_2회 – YouTube
핵심 요약
[한 줄 요약] 구약 성경은 합리주의나 현대 과학의 언어가 아닌 고대 근동의 ‘신화적, 상징적 언어’로 기록되었으며, 주변 강대국들의 문화적 유혹 속에서 야훼 하느님을 향한 유일신 신앙을 치열하게 정립해 나간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제적인 삶의 기록입니다.
- 근동과 중동의 지리적 정 정리: 근동(가까운 동쪽)은 과거 서유럽 중심주의가 만들어낸 언어적 관행이며, 유라시아 대륙 전체의 거시적 맥락에서 보면 이집트와 이라크를 아우르는 이 장소는 중동(가운데 동쪽)으로 지칭하는 것이 현대적인 지표에 부합합니다.
- 의미와 상징의 미디어: 성경 속 신화의 언어는 무지몽매한 미신이 아니라, 과학의 문장으로 담아낼 수 없는 영원한 신적 진리와 하느님의 거룩한 실존(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을 전달하기 위한 가장 탁월한 의미의 미디어입니다.
타임라인별 상세 내용
[00:00 ~ 04:21] 도입부: 중동(Middle East)과 근동(Near East)의 지리적 정체성 정리
- 본격적인 준비운동: 지난 제1강의 오리엔테이션에 이어, 이번 제2강은 본격적인 이방 신들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 체력을 다지는 ‘준비운동’ 시간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발을 딛고 살았던 고대 근동의 지리적, 시간적 무대를 정직하게 직면해 봅니다.
- 유럽 중심주의 언어의 타파: 우리가 흔히 이스라엘, 이라크, 이집트가 위치한 장소를 중동 혹은 근동이라 부릅니다. ‘근동(가까운 동쪽)’과 ‘극동(먼 동쪽, 한국과 중국)’이라는 표현은 과거 유럽을 온 세상의 중심에 두고 재단한 서유럽 중심주의의 산물입니다. 유라시아 대륙 전체의 지표를 기준으로 보면 이 지역은 ‘중동’이 맞습니다. 다만 학계의 관행(고대 근동학, 고대 근동 종교)에 따라 고대 사건을 다룰 때에 한하여 ‘근동’이라는 용어를 준수합니다.
[04:22 ~ 11:23] 시간의 방: 예수 그리스도와 알렉산더 대왕이 속한 아득한 세월의 감각
- 천년 칸의 시간 감각 훈련: 고대 근동이 얼마나 먼 시대인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천년 단위의 칸’을 머릿속에 그려봅시다. 우리는 현재 기원후 2000년대인 21세기에 살고 있습니다. 인류의 삶을 바꾼 산업혁명(18세기)이나 한글 창제(15세기), 고려 건국(918년)은 인류 역사 전체로 보면 아주 최근의 어제 일에 불과합니다.
- 고대 근동의 마침표, 헬레니즘: 마케도니아 출신의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 군대를 이끌고 중동 전체를 점령한 시기가 기원전 332년(4세기)입니다. 이때 유럽의 인도유럽어족 문화(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가 유입되는데, 이를 ‘헬레니즘(Hellenism) 문화’라고 합니다. 고대 근동학의 관점에서 이 헬레니즘의 유입은 고대 근동의 고유한 문명이 마감된 ‘끝 시점’을 의미합니다. 페르시아 제국은 고대 근동의 마지막 토착 집에(지배) 세력이었습니다.
- 수메르에서 시작된 3000년의 역사: 고대 근동의 시작점은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기원전 3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즉, 구약 성경의 무대는 기원전 33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 무려 3000년의 세월을 아우르는 아득한 역사적 공간입니다. 기원전 1세기 원삼국 시대나 기원후 영년(0년)에 오신 예수님의 시대보다 훨씬 더 뒤로 걸어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세계입니다.
[11:24 ~ 14:30] 신학의 분과 이해: 구약 신학(Old Testament Theology)과 구약학(Old Testament Studies)의 차이점
- 독일을 비롯한 정통 학계에서는 구약 신학과 구약학을 엄연히 다른 학문으로 구별합니다.
- 구약 신학 (꽃): 구약 성경 본문 안에서 하느님에 관한 영적 진리를 귀합(귀납)하는 학문입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다루는 구원론, 메시아를 추적하는 메시아론, 하느님의 성품을 연구하는 실론 등이 이에 속합니다.
- 구약학 (뿌리): 구약 성경을 둘러싼 모든 학문적 배경을 역사비평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성경의 원어인 고대 히브리어와 아람어의 문법을 주변국 언어(우가릿어, 페니키아어, 가나안어, 아카드어)와 비교 분석하는 언어학, 고대 이스라엘의 정치적 정황을 규명하는 역사학, 고고학 등이 포함됩니다.
[14:31 ~ 18:42] 고대 근동학의 토대 위에 피어나는 구약 신학의 영성
- 뿌리가 튼튼해야 꽃이 핀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당나라나 왜국의 정황과 함께 들여다보듯 주변 강대국들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관찰해야 합니다.
- 신학적 프레임으로 볼 때, 최종 고백인 [구약 신학]은 가장 밑바닥의 [고대 근동학]이라는 배경 학문과, 그 위를 받치는 [구약학]이라는 단단한 기초 위에서만 비로소 올바르고 건강하게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오늘날 강단에 구약학적 깊이가 부재한 채 신약에만 치우치는 영적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 이 배경지식이 필수 교양으로 요청됩니다.
[18:43 ~ 24:22] 지형도로 보는 고대 근동의 4대 지역과 국제 교류의 실체
- 고대 근동의 무대는 지정학적 메커니즘에 따라 크게 4개의 권역으로 쪼개어집니다.
- 메소포타미아 지역 (동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끼고 풍요로운 농경을 바탕으로 거대 인구를 거느린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등 강력한 제국들의 발상지입니다. 이들은 훗날 이스라엘을 침략해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남유다 백성들을 포로(바빌론 유배)로 잡아간 장본인들입니다.
- 이집트 지역 (남부): 나일강 문명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의 역사 초창기(탈출기)부터 끊임없이 강력한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한 거대 세력입니다.
- 아나톨리아 반도 (북부): 지금의 터키 지역으로, 한때 철기 문명을 바탕으로 대제국을 가구(가꾸)었던 히타이트(헷 족속)의 무대입니다.
- 레반트 시리아 팔레스티나 지역 (북서부):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 있는 좁은 통로이자, 고대 이스라엘과 조그만 도시국가들이 밀집해 있던 약소국들의 무대입니다.
[24:23 ~ 28:06] 전략적 요충지에 끼인 약소국 이스라엘의 고달픈 운명
- 신용을 목숨처럼 여긴 무역 상인들: 이스라엘이 위치한 북서부 지역의 약소국들은 거대 제국들 사이에서 교역로 역할을 하며 장사(무역)를 통해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고대 무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기 치지 않고 흥정의 신뢰를 지키는 ‘신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변국 상인들과 깊이 교류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이 믿는 신들의 정체와 문화를 완벽하게 학습하게 되었습니다.
- 하느님이 선택하신 약함의 신비: 이집트의 아마르나 문서(토판 외교 문서)를 보면 당시 국제 공용어로 동부의 아카드어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듯, 이스라엘은 강대국들의 거대한 틈바구니에 끼어 편지가 지나가고 군대가 짓밟고 가는 ‘전략적 요충지’의 고달픈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비참한 구조였지만, 하느님은 하필 이 작고 약한 민족을 주권적으로 선택하셔서 인류 구원의 장대한 신비를 완성해 나가셨습니다.
[28:07 ~ 36:37] 합리주의를 넘어선 신화의 언어(Mythological Language)와 성경 진리의 무게
- 과학의 렌즈로 성경을 재단하는 오류: 현대인들은 전기가 들어오고 자동차가 다니는 최근 몇백 년 동안 축적된 과학적 합리주의 프레임에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도 과학의 문장으로만 이해하려다 딜레마에 빠집니다.
- 의미와 상징의 미디어: 학문적으로 볼 때 ‘신화의 언어’는 미신이나 비과학이 아니라, 인간의 체험과 영적 진리를 전달하기 위한 가장 고차원적인 ‘의미의 언어’이자 ‘시의 언어’입니다.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참뜻: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할 때의 하늘은 대기권이나 성층권 같은 물리적 공간을 뜻하지 않습니다.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유한하고 속적인 인간과 완전히 구별되시는 하느님의 ‘거대하신 거룩함과 초월성’을 신화적 공간인 하늘을 빌려 완벽하게 선포하는 상징적 진리입니다. 하느님은 변하기 쉬운 과학 이론의 조문 대신, 수천 년간 인류가 직관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한 의미의 도구인 신화의 언어를 채택하셨습니다.
[36:38 ~ 42:48] 피(Blood)의 신화적 고리와 레위기 정결 규례의 문화적 수용
- 피의 생명력과 영적 순환: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는 악령을 쫓고 질병을 치유하는 담무(다무)라는 ‘피의 신’이 존재했습니다. 고대인들은 병에 걸리는 이유를 악령의 침투로 보았기에, 피가 가진 강력한 생명력으로 이를 퇴치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 성경적 변혁과 토착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웃 나라의 피 신화를 알고 있었지만 이를 우상으로 숭배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그 문화적 정서를 선별적으로 흡수하여, 짐승을 잡을 때 피는 생명의 근원이므로 사람이 먹지 못하게 차단하고, 오직 제단을 정결하게 하거나 땅에 쏟아 생태적으로 순환시키는 레위기의 거룩한 정결 규례로 변혁시켜 수용했습니다. 성경의 권위는 진공 상태가 아니라 이처럼 주변 문화를 흡수하고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42:49 ~ 45:50] 결론: 셰마 이스라엘(Shema Israel)의 열심으로 걸어가는 믿음의 발걸음
- 나태(Sloth)라는 영적 직무 유기 청산: 중세 가톨릭 전통에서 ‘나태’는 단순히 늦잠을 자는 게으름이 아니라, 공동체와 함께 그물을 끌어올려야 하는 엄중한 현장에서 슬쩍 손만 얹고 대충 눈치 보며 힘을 쓰지 않는 ‘연합의 배신’을 뜻했습니다.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신명기 6장 4~5절의 셰마 말씀은 “하느님 한 분을 대충 믿지 말고, 온 힘과 목숨과 정성을 다해 열심으로 연합하여 사랑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은 하늘에 떠 있는 무릉도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거대한 고대 신들의 유혹이라는 현실의 바다(빙산의 수면 아래 숨겨진 거대한 고대 근동의 역사) 속에서 오직 하느님의 유일하심을 붙잡고 몸부림쳤던 우리 신앙 선배들의 눈물겨운 간증입니다. 이 배경을 무기 삼아 다음 주부터 본격적인 신들의 세계를 파헤치며 우리 영적 근육의 깊이를 더해 나갑시다.
제목: 구약성경과 신들: 평신도 신학자가 들려주는 최초의 하늘 신 아누 이야기
[고대 근동의 하늘신]_주원준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_3회 – YouTube
핵심 요약 (Snippet 영역)
[한 줄 요약]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에서 ‘신’을 뜻하는 최초의 문자는 곧 ‘하늘’을 형상화한 글자였으며, 고대 근동의 하늘 신 사상은 선과 악을 모두 관장하고 왕권을 확증해 주는 최고의 권위이자 인류 역사상 최초로 뒷방으로 물러난 숨겨진 신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 한국인의 독특한 하늘 정서: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하늘의 뜻, 하느님이 보우하사 같은 독특한 하늘 신앙의 종교심을 품고 있었기에, 마테오 리치가 하늘의 주인을 뜻하는 ‘천주’라는 호칭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 가톨릭 신앙을 주체적이고 폭발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 소실점의 형상화: 수메르인들이 진흙 판에 꾹꾹 눌러쓴 최초의 문자 ‘아니’는 인간의 시선이 머물다 삼라만상이 완전히 끝나는 아득한 하늘의 소실점을 상징하며, 인류가 직관적으로 고백한 최초의 신적 존재가 바로 하늘이었음을 증명합니다.
타임라인별 상세 내용
[00:00 ~ 04:21] 도입부: 우리 민족의 독특한 ‘하늘’ 정서와 천주실의(Deo Veritas)의 히트 비결
- 본격적인 본 게임 시작: 지난 시간의 준비운동을 마치고, 오늘부터는 제 책의 첫 단락인 ‘하늘 신’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합니다. 첫 번째 주제로 하늘을 선택한 이유는 우리 한국인들이 가진 독특한 하늘 사상이 성경의 배경지식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 언어에 숨겨진 종교심: 우리는 일상에서 “하늘에 기도한다”, “하늘의 뜻이다”, “하늘이 무섭지 않으냐”라고 말할 때, 허공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절대적 인격체인 ‘하느님’을 자연스럽게 연상합니다. 애국가에 “하느님이 보우하사”라는 가사가 당당히 들어간 것도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원시 유교와 동아시아의 하늘 사상 덕분입니다.
- 천주(하늘의 주인)라는 최고의 적중: 300년 전 한국의 평신도 학자들은 선교사 없이 북경까지 걸어가 마테오 리치가 쓴 ‘천주실의’라는 책을 발견하고 스스로 가톨릭 신앙을 수용했습니다. 마테오 리치가 하느님의 이름을 ‘하늘 천’ 자에 ‘주인 주’ 자를 써서 ‘천주’로 번역한 것이 한국인들의 가슴 깊은 곳에 있던 하늘 신앙을 정확하게 건드렸기 때문에 역사상 유례없는 자발적 선교 대박을 터뜨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04:22 ~ 10:56] 수메르 문명과 인류 최초의 반영구적 미디어 ‘점토판’
- 모든 신들의 아버지: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인들은 무려 3,600개나 되는 엄청난 숫자의 신들을 믿었습니다. (3,600은 고대 근동의 상징적인 수입니다.) 그 수많은 잡신들 중에서도 만신전의 우두머리이자 최고 존엄은 단연 ‘하늘 신’이었습니다.
- 인류 최초의 쐐기 문자: 수메르인들은 말랑말랑한 진흙 판을 다져서 꾸덕꾸덕하게 만든 뒤, 날카로운 철필로 꾹꾹 눌러서 글자를 새겼습니다. 한 획마다 삼각형의 머리와 긴 꼬리가 생겨나는 이 문자를 우리는 ‘쐐기 문자(설형 문자)’라고 부릅니다.
- 오천 년을 버텨낸 진흙의 위대함: 당시에는 이집트의 파피루스 풀로 만든 종이가 있었지만, 습기에 썩거나 불에 타기 쉬워 오래 보존되지 못했습니다. 반면, 고대 근동의 바비론(바빌론) 지역에서 채굴되는 아주 질 좋은 진흙 판은 글자를 새긴 뒤 응달에 말리거나 불에 구워내면 오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박물관에 고스란히 살아남아 인류의 기억을 전달합니다. 길가메시 서사시를 보면 이 질 좋은 진흙 광산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일 정도로 진흙은 귀한 자원이었습니다. 우리가 쓰는 유에스비는 며칠 만에 뻑이 나지만, 점토판은 인류사에서 가장 오래 버텨낸 위대한 미디어입니다.
[10:57 ~ 18:24] 최초의 문자 ‘아니(An)’에 담긴 삼라만상의 소실점
- 하늘 안, 땅 에레: 서강대학교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한자 암기 방식인 “하늘 천, 땅 지”의 훈장님 유전자를 빌려 수메르 쐐기 문자를 가르치면 아주 직관적으로 잘 외웁니다.
- 삼라만상의 소실점: 하늘을 뜻하는 최초의 문자 ‘아니(An)’는 수평선과 수직선, 사선이 교차하는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대지에 서서 저 멀리 아득한 하늘 끝을 바라볼 때, 시선이 더 이상 가지 못하고 완전히 끝나는 하늘 끝의 소실점을 고스란히 형상화한 글자입니다.
- 하늘은 곧 신이다: 이 글자는 음으로 읽으면 ‘아니’가 되지만, 뜻으로 읽으면 ‘딩기르(Dingir)’, 즉 ‘신(God)’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옛 한국인들이 한자를 이두나 향찰로 읽고, 현대 일본인들이 한자를 훈독과 음독으로 나누어 읽듯이 고대인들도 한 글자를 다양하게 활용했습니다. ‘아니’를 두 번 겹쳐 쓰면 ‘신들(복수형)’이 됩니다.
- 이 유서 깊은 문자가 시사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인류가 역사상 최초로 ‘신’이라는 존재를 표현하기 위해 만든 글자가 다름 아닌 ‘하늘’을 뜻하는 글자였다는 팩트입니다. 이집트 탈출(출애굽) 사건이 일어나기 무려 1,500년 전부터 인류는 저 아득한 하늘을 최고의 신으로 고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8:25 ~ 22:51] 고 바빌론(Old Babylon) 제국의 성립과 함무라비 법전의 이중 언어 문화
- 함무라비 왕가의 아카드어 천하: 기원전 19세기경, 수메르 문명이 저물고 혼란기를 거쳐 아무리인(성경의 아모리 족속)들이 주도하는 ‘고 바빌론 제국’이 패권을 장악합니다. 이 왕조의 가장 위대한 군주가 바로 그 유명한 함무라비 왕입니다. 함무라비 왕가는 제국의 공용어로 셈족 계열의 ‘아카드어’를 채택했습니다. 이로 인해 수메르어는 점차 사라지고 아카드어가 고대 근동의 천하를 지배하게 됩니다.
- 조선시대 선비들과 중세 라틴어의 이중 언어 생활: 고 바빌론인들은 자신들의 정치가 패권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가고 오래된 문명인 수메르인들에 대해 엄청난 신학적 존경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 그래서 이들은 평소 영수증을 쓰거나 행정 문서를 작성할 때는 일상어인 아카드어를 썼지만, 가장 중요한 신화, 제의, 종교, 학문 문서를 기록할 때는 조선의 선비들이 한글을 쓰면서도 족보나 제사에는 한자를 썼듯이, 그리고 중세 유럽인들이 자국어를 쓰면서도 학문에는 로마의 라틴어를 썼듯이 고귀한 수메르 문자를 혼용하는 정교한 이중 언어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22:52 ~ 28:39] 아카드어 ‘샤무(Shamu)’와 선과 악을 모두 관장하는 하늘 신 아누(Anu)
- 아카드어로 하늘을 뜻하는 단어는 ‘샤무(Shamu)’입니다. 아카드어 문서에서도 하늘 신은 모든 신들의 대장인 ‘아누(Anu)’로 족보의 첫 자리를 지킵니다. 고대 근동인들이 생각한 아누 하느님의 성품은 기독교의 거룩함과 달리 대단히 거칠고 역설적이었습니다.
- 선과 악을 동시에 품은 최고신: 아누는 선한 축복만 주는 신이 아니라, 악과 재앙도 직접 다스리는 존재였습니다. 《이슘과 에라》 신화에 따르면 아누가 대지의 여신과 결합하여(동양의 음양사상과 일치합니다) 자식을 낳았는데, 그 7명의 자식들의 이름이 전부 역병, 죽음, 재앙 같은 무서운 악령들이었습니다. 고대인들은 최고신인 아누에게서 일곱 악령(시비티, 아카드어로 숫자 7을 뜻합니다)의 재앙도 흘러나온다고 믿었기에, 이 재앙을 피하고자 공포 속에서 신에게 제물을 바치며 정결을 비는 종교 생활을 했습니다. 성경 이전부터 고대인들에게 ‘숫자 7’은 이미 거대한 한 단위의 상징수로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28:40 ~ 33:26] 길가메시 서사시 속의 하늘 신과 왕권을 확증하는 절대 권력
- 하늘의 황소를 보낸 복수의 신: 고대 근동의 위대한 영웅이자 우르크 성의 지도자인 길가메시가 너무 잘생기고 힘이 세자, 사랑과 전쟁의 여신인 이슈타르가 그를 강력하게 유혹합니다. 하지만 길가메시가 유혹을 단호히 거절하자 분노한 이슈타르는 최고신 아누에게 달려가 복수를 청합니다.
- 아누는 이슈타르의 눈물을 받아들여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수백 명의 젊은이를 짓밟아 죽이는 무시무시한 ‘하늘의 황소(고대 근동에서 황소는 막강한 절대 권력과 힘의 상징입니다)’를 지상으로 파견합니다. 결국 길가메시와 그의 친구가 이 황소를 때려잡으며 영웅성을 입증하지만, 이 신화는 최고신 아누가 개인의 사적인 복수와 잔인한 폭력의 배후가 될 수도 있음을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 임금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도장: 아누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지상 왕들의 ‘왕권을 확증’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의 서문을 보면 “만신전의 임금인 아누와 땅의 주인인 엔릴이 내 신하인 마루둑(바빌론의 주신)에게 천하를 다스릴 권세를 주었고, 나 함무라비에게 정의를 세우라고 명하셨다”며 자신의 왕정 계보를 아누 최고신에게 소급시켜 정통성을 선언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대권을 잡으려는 리더들이 “하늘의 뜻”을 구하는 정서와 완벽하게 부합합니다.
[33:27 ~ 43:26] 인류사 최초로 뒷방으로 물러난 숨겨진 신(Deus Otiosus)의 비극
- 정치 패권에 따른 신들의 세대교체: 고대 근동은 도시국가들이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던 과두제 사회였습니다. 한 도시가 패권을 잡으면 그 도시의 주신이 만신전의 최고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 은퇴한 신 아누: 수메르의 중심 도시 니푸르가 득세하자 니푸르의 주신인 ‘엔릴(대지의 신)’이 대장 자리를 차지하고, 아누는 서서히 현역에서 은퇴하여 하늘 위로 높이 올라가 버립니다. 이를 종교학 용어로 ‘데우스 오티오수스(Deus Otiosus, 물러난 신, 숨겨진 신)’라고 부릅니다. 아누는 최고 직위를 물러나 신들의 귀족 계급인 ‘아눈나키(50명의 귀족 신들)’와 하급 노동 신들인 ‘이기기(이구구)’ 모두의 할아버지 같은 존재로 뒷방에 안치됩니다. 창조 서사시 《아트라하시스》를 보면 아누는 땅의 다스림은 엔릴에게, 바다의 빗장은 지혜의 신 에아에게 분할해 주고 은퇴하는 영적 세대교체의 비극을 보여줍니다.
- ? 한국 문화 속 ‘숨겨진 신’의 생생한 비유:
- 옛 가난한 교우촌에 온 마을을 통틀어 단 하나밖에 없던 귀한 재봉틀이 어느 날 도둑을 맞았습니다. 증거도 없이 성도들이 한 가난한 과부를 범인으로 몰아가며 마구 정죄하자, 억울함에 피가 거꾸로 솟은 과부는 동네 사람들 앞에서 옷을 찢으며 소리쳤습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일이다!”
- 평소에 한국인들은 단군이나 옛 하늘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도 않고 찾지도 않습니다. 완벽하게 ‘물러난 신’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불교, 가톨릭, 개신교로 쪼개져 살다가도, 인간의 법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절대적인 억울함과 정의의 한계에 부딪힐 때 우리 입에서는 본능적으로 ‘하늘’이 튀어나옵니다. 고대 바빌론의 아누 역시 이처럼 평소에는 침묵하지만, 인간이 가장 극단적인 정당성을 주장할 때 소환되던 거대한 할아버지 같은 숨겨진 신이었습니다.
[43:27 ~ 47:04] 결론: 서북 셈족의 공간적 하늘과 구약 성경이 선포하는 거룩함의 지평
- 지정학적 지표에 따른 신앙의 차이: 고대 근동 세계 안에서도 신을 바라보는 스펙트럼은 완전히 갈라졌습니다. 태양신이 최고 존엄이었던 남부 이집트나 철기 문명의 북부 히타이트와 달리, 이스라엘이 속한 ‘북서부 셈족(레반트, 시리아 팔레스티나 지역)’의 세계에서는 하늘이 거대 인격을 가진 신이 아니라 단순히 ‘신이 다스리는 공간’으로 축소되어 불렸습니다. 이들은 가나안의 폭풍 신 ‘바알’을 가리켜 ‘하늘의 주인(바알 샤민)’이라 부르며, 하늘을 신이 타는 병거나 무대로 취급했습니다.
- 구약의 위대한 권위: 구약 성경은 바로 이 북서부 셈족의 언어(히브리어 샤마임)적 정황 속에서 탄생했기에, 하늘 자체를 인격신으로 숭배하는 동부 아카드어 방식의 우상숭배 바이러스를 철저하게 배격했습니다. 성경의 신학자들은 하늘을 신들의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발등상”*이라는 철저한 피조물의 공간으로 정립했습니다. 하느님은 고대 근동의 이 거친 신화적 언어의 바다를 뚫고 오셔서,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상징을 빌려 당신의 참된 거룩함과 정의를 우리 가슴속에 새겨주신 분입니다. 이 위대한 배경지식을 기억하며 다음 주에는 더 깊은 신들의 세계로 걸어가 봅시다.